2007년10월2일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지리산 무박 종주를 감행코자 저녁 10시 35분 산악회 버스에 올랐다.
그간 지리산 여러 코스 등산 경험도 있고, 30년 전 2박3일에 걸쳐 대원사 유평리에서 시작하여 구례 화엄사로 내려오는 코스와 3년 전 이맘때쯤 1무1박2일간 성삼재에서 대원사까지의 코스를 종주하는 등 2차례의 종주 경험도 있었지만 무박 당일 종주는 처음 시도하는 터라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설레는 마음을 안고 출발 하였다.
우등 버스로 개조하여 불편함이 없는 대형 버스였지만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는 동안 휴게소에서 한번 정차 후 대진 고속도로를 내쳐 달려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반선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백무동에서 천왕봉으로 오를 회원들을 내려놓고 일부는 식사를 하느라 잠시 머문 후 성삼재에 도착 3시05분 산행을 시작하였다.
불빛이 사라진 성삼재 넓은 주차장엔 코끝을 스치는 상큼한 바람과 초롱초롱한 별들만이 우리를 반길 뿐 적막이 감돈다.
뭐라 형용키 어려운 새벽 산중 특유의 상쾌한 내음이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날려 버린다.
출발은 제일 먼저 했지만 앞으로의 산행 거리를 감안 평상시보다 천천히 걷고 있음에도 노고단까지 2.5km를 오르는 동안 일행 19명 중 2명만이 앞서 가고 나머지는 보이지도 않는다.
노고단 대피소를 바로 통과해 노고단 안부에 도착하니 3시38분, 추석 대보름을 일주일 정도 지났을 뿐인데 달빛도 거의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 노고단의 운해는 지리산 10경 중 제2경으로 제1경인 천왕 일출과 견줄 정도로 비경이라는데....... 아쉽지만 돌탑만 카메라에 담고 이내 걸음을 재촉했다.
노고단 고개를 지나 임걸령까지는 큰 오르막은 없지만 큰 바위들이 드러나 있는 너덜길이다. 그 너덜길을 희미한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하여 조심조심 걷다 보니 웃음이 절로 난다. 이런 야밤에 깊은 산중을 혼자 걷는다는 것....... 과연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ㅎㅎㅎ......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혼자 걷다 보니 앞에 두개의 불빛이 보인다. 앞서 가던 우리 일행 선두다. 그 중 한명은 성삼재와 노고단 중간쯤인 코재를 지날 무렵 나에게 완주 하려면 초반에 속도를 내야 한다며 서둘러 앞서가던 회원이다. 산행을 많이 해봤다기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벌써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보면 오버페이스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일행과 환담을 나누며 너덜길을 지나고 능선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4시25분 임걸령에 도착했다. 임걸령 표지판을 카메라에 담고 물 한 모금 마시는 사이 일행은 노루목을 향해 벌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배낭을 고쳐 메고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디선가 “크르렁” 소리가 난다. 앗! 곰인가 보다. 혼비백산하여 주위를 살피니 아니! 이런~ 길 옆 편평한 바위위에서 비박하는 산객의 코고는 소리다. ㅋㅋㅋ.....
임걸령을 지나 처음으로 조금 가파른 능선길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니 4시48분 노루목이다. 앞서 온 회원들과 잠시 쉬기로 하고 배낭을 벗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산행 시작 약1시간 반 만에 처음으로 갖는 휴식이다. 이곳에서 왼쪽 봉우리로 오르면 반야봉이지만 야밤이라 조망도 할 수 없고 몇 번 오른 봉우리라 잠시 숨만 고르고 일행을 따라 이내 우회하여 삼도봉으로 향했다.
아직도 어둠에 묻혀있는 삼도봉 너럭바위 위에는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꼭지점을 알리는 삼각형의 동판만이 덩그러니 서있다. 삼도의 분기점을 그냥 지나치긴 아쉬운 감이 있어 표지판을 카메라에 담고 5시04분 삼도봉을 통과했다.
삼도봉을 지나면 뱀사골 대피소가 있는 화개재 직전에 예쁜 데크로 꾸며진 나무 계단이 나온다. 들리는 말에는 이 계단의 수가 600개 정도가 된다고 한다. 화개재쪽에서 올라올 때에는 무지 힘든 계단이지만 내리막이라 지루함도 달래고 확인도 할 겸 하나, 둘, 셋 세며 내려가는데....... 이런~ 한 이백 여개를 세었을 무렵 옆에 가던 일행이 말을 거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또 올 핑계가 하나 더 늘었다. 다음에는 꼭 직접 세어 확인하리라. ㅎㅎㅎ........
화개재도 나무 데크로 예쁘게 꾸며져 있고 남쪽 데크엔 포토 존도 있는데 5시18분 아직도 야밤이라 그냥 통과한다. 옛날에는 경남에서는 연동골로 소금과 해산물을 가지고 올라오고 전북에서는 뱀사골로 삼베와 산나물을 가지고 올라와 서로 물물교환을 하던 장터라는데....... 이곳에서 북쪽 뱀사골 쪽으로 나무계단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뱀사골 대피소가 있는데 올 9월인가 10월부터인가 폐쇄 되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운치가 있던 대피소인데 좀 아쉽다.
화개재 위 토끼봉을 오르면서 동행 하던 우리 회원이 조금씩 처지고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다른 산악회원들이 몇 무리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들을 뒤로하고 명선봉에 가까이 오자 여명이 밝아온다. 앞쪽의 봉우리 사이 하늘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며 일출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었지만 바로 덮치는 구름과 안개에 그 기대가 산산조각 나버린다.
사진 몇 장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6시34분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하니 대피소가 공사 중에 있어 어수선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식사도 하고 쉬고 있다. 나도 우선 항상 시원하고 철철 넘치는 샘물을 한바가지 마시고 아침을 때우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행동식으로 준비해온 빵과 우유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10여분을 쉬고 있는데도 같이 오던 일행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성삼재로부터 13km........ 전체 산행거리의 약 3분의1정도 진행한 것이다. 갈 길이 멀다. 물을 보충하고 출발.........
거의 평지 같은 숲속 길을 조금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고사목과 단풍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이 어우러져 고산의 멋진 가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또 앞으로 보이는 형제봉도 남쪽 산허리는 운해가, 북쪽 사면은 울긋불긋한 단풍이 가을 초입 고산의 아침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7시51분에 도착한 벽소령대피소에는 아침을 해결하려는 산객들로 분주하다. 벽소령은 빼어난 경관과 지리산 등줄기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깊은 밤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은 차갑고 시리도록 푸르게 보인다 하여 그 모습을 '벽소명월'이라 칭하여 지리10경 중 하나로 꼽는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런 경치를 감상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아쉽지만 연하천에서 아침을 해결한 나는 화장실에 들러 속(?)만 비우고 바로 출발했다.
벽소령대피소에서 구 벽소령까지는 옛날 시골 마찻길처럼 비교적 넓고 평탄한 흙길이다. 그 흙길을 옛날 어릴 적 시골길을 생각하며 걷는데 앞에 금발의 늘씬한 외국 아가씨가 자기키 만한 큰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걷는 게 보인다. 배낭 크기로 보아 단독으로 숙박까지 하면서 종주하는 것 같아 대단하다 생각하며 얼굴을 보니, 아니 이럴 수가? 아가씨가 아니고 할머니다. 그 앞에 남편인 듯 보이는 할아버지가 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 나이에 외국에서 이렇게 종주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긴 산을 좋아하면 나이나 장소가 무슨 장벽이 될 수 있으랴. 어쨌든 유쾌했다. 거기다 능선 아래 운해를 보며 걷다보니 더욱 즐겁고 발걸음도 가볍다.
8시40분 선비샘에 도착했다. 선비샘도 임걸령의 샘이나 연하천의 샘과 마찬가지로 1400m이상 되는 높은 곳에 있는 샘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시원하고 수량이 풍부하다. 이곳에서도 시원한 약수만 마시고 바로 출발.......
덕평봉을 지나 칠선봉으로 가는 동안 눈앞에 펼쳐지는 봉우리들이 이제 갓 물들기 시작한 단풍과 아침 해에 아직 가시지 않은 운해와 어우러진 풍경이 가슴이 벅찰 정도로 황홀하여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보지만 해를 안고 진행하는 코스라 대부분 역광으로 화면이 어두운 것이 아쉽다.
9시13분 칠선봉에 도착하여 봉우리의 단풍과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또 바로 발걸음을 옮긴다. 칠선봉을 지나면 한참 내리막길이다. 앞에는 또 긴 오르막 철계단이 기다린다. 이제 오르막이 서서히 힘겨워진다. 그러나 단풍으로 물든 철계단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피곤함을 씻어준다. 힘겹게 오른 영신봉 직전의 암릉에서 보는 풍경은 더더욱 환상적이다. 운해위로 수즙은 듯 삐죽 솟아있는 봉우리들은 바다의 섬이요 발밑에 펼쳐진 울긋불긋한 단풍은 수채화다.


무거워진 발을 끌며 9시50분 영신봉에 올라서니 세석평전이 펼쳐진다. 저 아래 안부에 포근히 앉아있는 세석산장이 정겨워 보인다.
세석평전은 해발 1,600m에 펼쳐진 수십만 평의 고원으로 매년 5월 하순부터 6월 초순까지 수만 그루의 철쭉꽃이 자색의 꽃망울을 터트리는 고원 특유의 정경이 낭만적이고 환상적이다 하여 이곳 세석철쭉을 지리10경중의 하나로 꼽는다. 그러나 지금 곱게 물들어 마치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단풍의 모습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다.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 세석평전 한 가운데 있는 산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9시59분 산장과 촛대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촛대봉 근처에서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세석산장을 그대로 지나쳐 촛대봉으로 향했다. 그리 경사가 심한 것도 아닌데 점점 더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촛대봉에는 많은 산객들이 모여 있어 길옆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남은 빵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요기를 하고 나니 온 몸이 나른해진다. 풀밭에 大자로 누워 기지개를 펴본다. 하늘에는 구름이 냇물처럼 밀려간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행복하다. 이대로 시간이 정지되었으면.........ㅎㅎ
촛대봉에서의 조망도 시원하다. 천왕봉은 안개에 쌓여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지만 그 앞의 삼신봉 연하봉 제석봉 등은 안개 사이로 그 봉우리가 보인다.
이제 천왕봉까지의 거리는 4.4km. 평상시 같으면 시간 반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라 멀게만 느껴진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다리를 끌며 삼신봉을 거쳐 11시02분 연하봉에 다다르니 기암괴석과 고사목 그리고 층암절벽 사이로 흘러가는 운무가 어우러져 그 위에 있는 내가 마치 신선이 된 듯 정신이 다 몽롱하다. 아~ 이래서 이곳을 연하선경이라 하지 않는가!


선경에 취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간신히 옮겨 연하봉을 내려서니 11시14분 드디어 마지막 대피소인 장터목산장이다. 이곳도 많은 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도 산장 아래에 있는 샘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올라와 처마 밑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마지막 휴식을 취한다. 이곳은 비가 왔는지 땅이 젖어있고 짙은 안개로 시계가 좋지 않다.

이제 천왕봉까지는 1.7km. 힘을 내어 제석봉을 오른다. 장터목에서부터 이어지는 돌계단이 더욱 길게만 느껴진다. 땅만 보고 한발 한발 내딛으니 어느새 10여만 평의 제석봉 고사목 군락지가 펼쳐진다. 누렇게 변한 풀밭 위로 수많은 고사목들이 장승처럼 듬성듬성 늘어서 있다. 이 고사목들은 40여 년 전 누군가의 방화에 의해 죽은 나무의 시체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자체의 경관이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니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11시37분 제석봉 도착. 제석봉은 옛날 산신의 제단인 제석단이 있던 곳으로 지리산에서 중봉다음 세 번째 높은 1806m 높이의 봉우리로 주봉인 천왕봉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 중봉, 서쪽에 이 제석봉이 자리 잡고 있다. 등산로 이외는 출입금지라 제석단도 볼 수 없고 짙은 안개로 조망도 좋지 않아 그냥 통과한다.

제석봉을 내려서 안부를 지나 통천문을 통과한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 하던가? 과연 이름답게 이곳을 통과하니 하늘에 통한 듯한 거대한 바위산인 천왕봉이 안개사이로 잠깐잠깐 얼굴을 내민다.



11시55분 안개를 헤치고 드디어 성삼재를 출발한지 8시간50분만에 정상에 섰다. 천왕봉 표지석을 잡는 순간 지금까지의 힘들었던 기억이 말끔히 씻겨나가고 벅찬 성취감이 피로도 날려버린다.


아쉬운 것은 천왕봉에 오를 때마다 짙은 안개로 발아래만 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도 다시 천왕봉에 오를 빌미를 주는 것이라 생각하니 그리 억울할 일도 아닌 것 같다.
많은 산객들 틈에서 간신히 기념 촬영을 하고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마지막 간식을 한 후 하산길에 들었다. 중산리 매표소까지 5.4km. 빨리 내려가면 1시간 남짓 소요될 것으로 판단하고 부지런히 내려가는데 심한 경사와 많은 사람들로 인해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는다.
덕분에 무리하지 않고 개선문 법계사 망바위 칼바위를 지나 오후 1시40분 드디어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 장장 33.4km, 10시간35분간의 지리산 종주를 끝냈다.






식당 겸 민박집의 목욕실에서 샤워 후 하나 둘씩 도착하는 회원들과 함께한 지리산 동동주 맛,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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