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봉산 야생화 향기에 취하다
오늘은 2005년 5월 22일.
지난주 거른 게 아쉬어 조금 멀고 높은 산을 택하여 남설악 점봉산에 가기로 했다.
어제 새벽 4시에 일어나 별로 내키지 않는 운동을 나갔다가 술도 한잔하고 늦게야 잠에 들은 탓인지 아침 6시 기상이 조금은 힘들었지만 좋아하는 산행이기에 내 발길은 어느새 상쾌하게 점봉산행 산악회 관광버스 탑승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걸려온 유쾌하지 않은 전화 2통, 같이 가기로 했던 동료가 어제 과음 탓에 일어나지 못했다고.... 뒤이어 들려온 것은 ‘점봉산이 무분별한 사람들의 야생화 및 산나물 채취로 올해까지 자연휴식년제가 풀리지 않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산행계획을 변경한다.’는 등반대장의 전화다.
당초계획은 진동리의 설피교에서 단목령을 거쳐 점봉산 정상에 오른 후 작은점봉산 곰배령을 거쳐 강선골 설피교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산행 이었으나, 입산통제로 한계령 바로 밑 흘림골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여심폭포를 거쳐 등선대로 올라 7형제봉을 조망 후 등선폭포, 주전골 십이폭포, 용소폭포를 거쳐 오색약수로 하산하는 코스로 정했다며 싫으면 승차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등반대장의 속 보이는 무책임한 말과, 2~3시간 산행을 위하여 10시간 이상을 차에서 허비해야 하는 억울함. 동료의 약속 파기에 대한 불쾌감 때문에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주전골의 비경도 다시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이왕 내친김에 다녀오기로 마음을 굳히고 7시40분 8호선 성남의 복정역에서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 내 옆자리는 동료의 펑크로 비어있어 비교적 편안하게 잠을 즐기는 사이 11시쯤 산행 들머리인 흘림골 입구에 도착했다.
오후 5시에 오색약수 주차장에서 버스가 출발할 예정이니 여유 있게 산행을 하라는 등반대장의 도움말(?)을 듣고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를 고민하면서 오전 11시10분 매표소를 깃점으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주변경관을 음미할 시간도 없이 15분정도 오르니 우측으로 첫 번째 명소인 여심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폭포의 물줄기와 그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좌우 절벽의 모습이 마치 여자의 깊은 그 무엇(?)과 흡사하다 하여 여심폭포로 이름 지어졌다는 차안에서의 등반대장 안내멘트를 떠올리니 그 오묘한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선두로 같이 올라온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산우와 야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금새 의기투합하여 보통 7시간 이상 소요되는 산행코스지만 지금까지의 산행속도만 유지한다면 5시간 정도면 가능할 것 같으니 우리 둘만이라도 주전골 십이폭포부터 망대암산을 거쳐 점봉산에 오르기로 합의를 보고 기념(?)촬영 후 부지런히 오르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능선인 등선대 전망바위에 오르자 눈앞에 7형제봉 등 기괴한 모습들의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서북쪽엔 한계령 휴게소가, 북쪽엔 설악 대청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동쪽에는 시원한 동해바다가, 남쪽으로는 오늘의 산행목표인 밋밋한 봉우리의 점봉산 정상이 보인다.
한계령과 대청봉등을 카메라에 담고 등선대를 내려오자 능선에는 우리산악회의 두 번째 그룹이 올라온다.
이들을 뒤로 하고 빠른 속도로 능선을 내려와서 등선폭포가 있는 계곡을 지나 다시 능선 하나를 올라 횡단하여 주전골의 십이폭포에 당도했다.
지도상 여기서 계속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오색약수가 나오고, 올라가면 주전골의 상류를 거쳐 망대암산에 오르게 되는 갈림길이다.
우리는 혹여 출발시간에 늦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십이폭포를 보는 둥 마는 둥(등선폭포나 무명폭포도 마찬가지로 지나쳤지만) 하고 출입금지 안내판을 애써 외면하며 주전골 상류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계곡에는 벌써 수년째 출입금지지역이라 간혹 등산로가 희미한 곳도 있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지 비교적 뚜렷한 등산로를 따라 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주전골을 오르는 동안 만나는 탕, 담, 소는 가히 탄식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기기묘묘하고 아름다웠다.
한참을 오르도록 인적이 없더니 거의 상류쯤에 다다르자 이름 모를 작은 폭포 앞의 너른 바위에 두 부부가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점봉산을 오른다는 그들에게서 바나나를 얻어들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자 이제 물소리가 잦아들면서 능선 안부가 나온다. 아마 십이폭포를 12시10분쯤 통과해서 약 40분쯤 지난 시각인 것 같다.
안부 등산로 주변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가 여기저기서 제각기 자태를 뽐내며 바람에 하늘거리고 독특한 꽃내음 또한 상큼하다.
그러나 등산로 양옆으로는 야생화 채취흔적인지, 멧돼지가 먹이를 찾느라 파헤친 흔적(동행한 산우의 의견)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흔적들이 여기저기 즐비하다.
그러한 흔적은 망대암산 정상 바로 밑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야생화 채취흔적 같기도 하고 파헤쳐진 상태를 보면 이성을 가진 사람이 한 짓으로 보기에는 다소 의심이 가기도 한다. 어쨌든 보기흉한 그런 모습이었다.
능선 안부를 비스듬히 돌아 5분쯤 헐떡거리며 가파르게 오르니 능선이다. 이 능선이 바로 우측으로 가면 필례약수 한계령으로 향하고 좌측으로 가면 망대암산-점봉산-단목령을 잇는 백두대간길이다.
능선 위에는 배낭마다 산나물과 야생화로 가득채운 일단의 아줌마 아저씨 무리가 점심중이다.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에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으나 우리가 배낭의 내용물을 보고 표정이 굳어지자 그쪽도 머쓱해 한다.
우리도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씁쓸하다.
시계를 보니 오후1시. 쉬지도 않고 2시간을 내쳐 올라왔더니 시장기가 슬슬 돈다. 망대암산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정상 근처에 가서 요기를 하기로 하고 조금 오르다 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전에도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는 했으나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내릴 태세다. 우리는 더 내리기 전에 식사를 하기로 하고 평평한 곳에 자리를 폈다. 동행한 산우는 도시락을, 나는 토마토 1개를 곁드린 양갱, 초코바 등 행동식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니 오후 1시20분이다. 10분도 채 되지 않는 식사 겸 휴식을 마치고 다시 오르기 시작하니 바로 망대암산 정상이다. 주전골 상류부터는 바위가 보이지 않는 육산이더니 망대암산 정상은 큰 바위 여러개가 어우러진 바위 봉우리다. 그 정상에서 바라보는 사방은 확 틔어 조망이 상당이 좋다. 설악산은 물론 서북쪽 한계령과 가리봉이 멀리 보이고, 진행방향의 점봉산과 그 능선이 훤하게 굽어보인다.
둥그런 정상과 완만한 능선이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게 느껴지며 부드러운 곡선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 능선을 오르는 동안 가끔씩 백두대간 길을 타는 산사람들을 마주치며 나누는 인사도 정겹고 능선 주변에 펼쳐지는 야생화군락. 철쭉군락, 주목군락들이 어우러진 모습도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조금 굵어지는 빗줄기에 배낭커버를 씌우고 오버자켓을 걸친 후 경련이 일어나는 허벅지를 주무르며 마지막 스퍼트. 오후 2시15분 드디어 정상이다.
“점봉산 1,424m” 표지석이 우뚝 서있다.
십여년 전에 왔을 때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감회가 새롭다.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진 듯 머리가 텅 빈듯한 느낌이다. 그냥 하늘에 떠있는 기분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사방을 둘러보니 내리는 비 탓에 조망이 좋지 않다. 설악산 한계령 동해는 안개에 가려있고 동남쪽의 작은점봉산과 곰배령, 북동쪽의 단목령. 그사이 아래로 진동리인 듯한 마을만 얼핏 보인다.
거기에다 바람이 무척 차다. 장갑을 챙겨 끼고 자켓을 여미니 작년 이맘때쯤 설악 대청봉을 오르던 때가 생각난다.
동해의 일출을 대청봉에서 볼 일념에 새벽3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별을 보며 오색약수를 출발하여 대청봉에 오르니 총총히 떠있던 별이 순식간 사라지고 진눈개비가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추위에 떨며 겨우 사진 한 장 찍고 중청대피소로 달려 내려갔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하산을 준비한다.
기념사진 몇컷을 찍고 물 한 모금 마시고 하산길을 점검했다. 안내 표지판이 없어 지도를 펴놓고 방향을 가늠한 후 단목령 쪽으로 진행하다 만나는 갈림길마다 무조건 좌측으로 길을 잡기로 하고 오후 2시25분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길 중간 중간 대간길을 타는 산사람들을 보니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중 60대로 보이는 노부부가 무척 부러웠다.
나도 저 나이에 우리 마눌님과 백두대간을 탈 수 있을런지.....
한참을 내려가다 드디어 갈림길을 만났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잡고 무조건 내려가니 능선길이 무척 가파르다. 그러나 늦을 줄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스틱에 의지하며 달리듯 내려갔다. 비개인 하늘아래 나뭇가지 사이로 간간이 나타나는 대청봉이 신비하게 보인다.
하산 시작 후 50분쯤 내려가니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바닥에 거의 다다른 모양이다. 이제 거의 다 내려왔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리며 허벅지에 통증이 느껴진다.
능선 끝 무렵에서 마지막으로 좌측으로 틀어 조금 내려오니 오색약수 매표소 아래 상가지역이다.
오후 3시35분. 드디어 4시간25분만에 산행을 마쳤다.
약수터 밑의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피로가 싹 가시며 뇌리엔 오늘의 산행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대충 매무새를 정리하고 동동주와 감자전이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가게로 들어섰다.
생면부지로 산행길에 처음만난 사람과 동지애를 느끼며 방향표시 등 안내표지판 하나 없는 산행을 무사히 마친 것을 자축하는 하산주를 몇 순배 돌리다보니 어느새 취기가 돈다.
아니 점봉산 야생화 향기에 취한건지도 모른다.
얼큰한 기운에 십년지기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도 오늘도 여느때처럼
끝내 통성명은 하지 않았다.
산행중에 만난사람들은 통성명을 하지 않는 것이 관행인가 보다. 묻지마 관광(?)도 아닌데 말이다.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악산 용아장성 종주기 (0) | 2005.08.21 |
---|---|
설악산 공룡능선(오색-대청봉-공룡능선-마등령-비선대) 산행기 (0) | 2005.08.07 |
대승폭포와 십이선녀탕 (0) | 2005.07.25 |
산상의 야생화원 (0) | 2005.07.16 |
지리산 종주기록 (0) | 2005.06.08 |